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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역사 1883년-1939년

 

재일대한기독교회 약사

전사(前史)(1882-1907)

1882년 제 4차 수신사(修信使)의 비공식수행원으로서 내일(來日)한 이수정(李樹廷)이 크리스챤 농학자 津田仙을 만나, 다음해 1883년 4월에 세례를 받고 조선인 유학생이 중심이된 조선인교회를 개설하여 신앙공동체의 형성에 힘썼다. 또 성경번역 및 아메리카에서 H.G Underwood(北長老敎), H.G.Appenceller(北監理敎) 두 선교사가 조선에 파견되는데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동경에서의 조선인교회는 1886년 5월에 이수정이 귀국함으로 중단되지만, 단기간이기는 했으나 그가 뿌린 씨앗은 그후 모국교회의 형성으로 연결되고, 또 일본의 지도적인 그리스도인과의 교제는 재일교회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20년이 지나 1906년에는 늘어나는 유학생의 지도를 위해서 동경에 조선기독교청년회가 설립되어 성경연구와 예배가 행해지고, 그 결과 동경교회가 설립되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와 조선감리회에 의한 선교(1908-1925)

1908년 평양에서 내일(來日)해 있었던 정익노(鄭益魯) 장로, 그리고 김정식(金貞植) YMCA총무 및 유학생이 모여, YMCA와는 따로 교회를 설립(동경교회)하기로 의견의 일치를 보아, 장로교회에 목사 파견을 요청한 것이 오늘날의 재일선교의 시작이다.

1909년 10월에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獨老會)의 한석진(韓錫晋) 목사가 약 3개월간 체재하며 교회의 임원체재를 정비하고, 전도장노에게 후사를 맡기게 되었다. 1912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와 감리회에 의한 선교합의가 이루어져, 장·감예수교연합에 의한 선교가 실시되게 되어 교회 이름은 “동경연합예수교회”로, 파견목사의 임기는 서로 2년교대로 하기로 하고 1913년 주공삼(朱孔三) 목사가 취임하였다. 한일합병이전의 재일조선인의 대부분은 유학생이었다. 그러나 1910년 합병후, 재일조선인의 구성은 크게 변하게 되었다. 조선에서 토지조사사업등에 의해 토지를 빼았긴 농민의 유민화(流民化)와 제1차세계대전후의 일본경제의 활황(活況)과 때를 맞추어 일본자본주의는 일본인노동자보다도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을 강제할 수 있는 식민지노동력으로서 조선인의 일본본토에의 이주를 요구하였다.그 이후 조선인노동자는 간사이(關西)지방을 비롯하여 아이치(愛知), 큐슈(九州), 혹카이도(北海島) 등의 일본노동시장의 저변층에 유입(流入)되어 정주하기 시작하였다. 재일조선인 인구는 1920년에는 3만에 지나지 않았으나, 1930년에는 30만명으로 급증하였다. 이에 따라서 동포전도도 유학생으로 부터 노동자에로, 도쿄(東京)지역에서 츄부(中部), 혹카이도(北海島)에로 전국적으로 넓혀지기 시작했다. 1917년무렵부터는 요쿄하마(橫浜), 고오베(神戶)에, 1920년대 초기에는 오사카(大阪), 교토(京都), 나고야(名古屋)에도 교회가 형성되었다. 간사이(關西)지방에 김이곤(金二坤) 목사가 파견된 것은 1922년이었다. 그때까지는 고오베(神戸)신학교에서 배우고 있던 신학생이 전도를 담당하고 있었다. 1925년에는 나고야(名古屋)에서 전도자의 파견요청이 있어서 오사카(大阪)로 부터 김필도(金弼道) 신학생이 파견되었다. 이 시기, 1919년 2·8독립선언식을 거행함에 따른 경찰의 탄압, 1923년 9월의 칸토(關東)대지진에 의한 시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은 착실하게 전파되었다.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와 카나다 장로교회에 의한 선교(1926-1938)

1926년에 큐슈(九州)지방에 오택관(吳澤寬) 목사가 연합공의회로 부터 파견되었다. 1927년에는 카나다 장로교회가 재일선교에 가담하기를 결정하여 L.L. Young선교사 등이 적극적으로 전도활동을 행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카나다 장로교회의 재일선교의 참가와 재정적인 도움은 커서, 조선인목사·전도자의 숫적인 증가로 연결되어 교회성장을 가져 왔다. 1928년부터 1934년까지 교회의 수와 교회원의 수는 두배가까이 되어서 45 교회가 존립하고, 신도수도 2,300명이 되었다. “도쿄(東京)를 비롯하여 나고야(名古屋), 큐슈(九州), 혹카이도(北海島)까지 전도자의 발자취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라고 하는 말처럼, 노동자로서 일본전국에 흩어져 있던 동포에게 적극적으로 전도하였다. 나라를 빼았기며 농지를 잃고서 생활의 양식을 찾아 일본에 온 동포노동자는, 일본에서도 경시받으며 어쩔 수 없이 임금차별등의 생활을 겪지만, 교회는 마음의 안심을 누리는 오아시스와 같은 장소임과 동시에 고향소식이나 민족의 아픔을 서로 나누는 신앙의 공동체이었다. 또 교회는 재일동포에게 있어서 필요한 일본어나 조선어, 그리고 역사를 가르치기 위한 야학교(夜學校)와 유치원의 개설에 힘써 1933년에는 야학교(夜學校) 24 개소, 유치원이 9 개소가 되어 동포사회의 교육사업에 봉사하였다.

재일본조선기독교회의 시기(1934-1940)

1934년 2월, 재일본조선기독교회대회가 창랍되었다. 이에 의해 신조와 헌법을 제정하여 4 개의 중회(中會), 1 개의 지방회를 이끄는 조직교회가 되어, 목사와 장로의 안수가 집행되게 되었다. 1940년, 신도총수가 4,000명에 이르게 되었다. 1936년에 일본기독교연맹에 가맹할 때, “조선기독교회”로 개칭하였다. 조선기독교회의 시기는 6년여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재일조선교회의 조직적인 자치가 꾀해지며, 고유하게 영위되기 시작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중국침략(15년 전쟁) 하에서, 종교단체법이 공포됨에 따라 1938년 제3회 대회에서 같은 계통의 장로파인 일본기독교회와의 “협조” 또는 “합동”을 결의하였다. 일본기독교회와의 교섭 가운데 제시된 조건은, 일본기독교회의 “신조”에 대한 복종, 포교에 있어서 “일본어 사용”, “교역자 재시험”등 이었다. 1939년, 종교단체법의 공포에 따라 “협조”의 길은 없어지고, 1940년 1월 임시총회를 개최하여 일본기독교회로 부터 제시된 조건에 의한 “합동”을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이 흡수합병은 “재일” 조선교회에게 있어서 굴욕적이며 고뇌 가운데의 결단이었다. “재일”조선기독교회는 어쩔 수 없이 하나의 교파로서 해체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