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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역사 1940년-1969년

 

재일대한기독교회 약사

일본기독교회, 일본기독교단의 시기(1940-1945)

1940년 2월 부터, 일본기독교회에 가입신청 및 교사·교사보(補)의 가입신청이 중회(中會)별로 이루어 졌다. 62 교회·전도소의 가입이 수리되었다. 같은 해 12월에 카나다 장로교회의 선교사 일행이 귀국하였다. 나아가 일본이 국가권력의 종교에 대한 통제를 본격화하여, 1941년 6월 일본기독교단 설립시에는 일본기독교회로서 제1부에 가입시켜졌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 돌입해 가는 중, “재일”조선인교회에 대해서는 조선독립운동에 대한 관헌의 감시와 탄압, 창씨개명(創氏改名)이나 일본어사용, 황민화(皇民化)정책은 점점 심해졌다. 1941년부터는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등에 의한 교회지도자의 연행, 구속이 시작되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아카시(明石)교회, 쿄오토(京都)남부교회, 후시미(伏見)교회등이 교회폐쇠라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12월에는 태평양전쟁돌입에 따른 “비상조치”로서 경찰의 특별고등과(特別高等課)는 재일조선인의 일제검거를 시작하여 124명을 체포·연행하였다. 그 중에는 아이치켄(愛知縣) 11명, 오사카(大阪) 3명, 효고(兵庫) 4명의 그리스도인이 포함되어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일본인목사가 재일조선교회의 주관자가 되어, 예배도 일본어로 행하도록 강요당하였다. 1945년 2월에는 교회수 48, 신도수 3,088명, 정교사 25명중 현주자(現住者) 12명으로, 보교사(補敎師) 44명중 현주자 9명으로 감소했다.

재일대한 기독교회기(期)(1945-)

하나님은 그 섭리 가운데,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과 동시에 조선민족과 교회를 해방하셨다. 해방된 조국으로 민족의 대이동이 있었다. 재일조선인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귀국할 생각으로 그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 해방후의 재일대한기독교회의 재건이 시작되었다.

재일본조선기독교연합회의 창립

일본에 남은 교직자 및 신도들은 1945년 10월 30일, 오사카(大阪)교회에서 재일조선그리스도교연합회창립준비위원회를 개최하였다. 이 준비위원회를 거쳐 같은 해 11월 25일에 재일본조선기독교연합회 창립총회가 쿄토(京都)교회에서 개최되었다. 참가교회 21, 출석자 47명(그중 목사 3명)이었다. 교회를 초월한 연합회의 창립, 규칙의 제정, 일본기독교단으로 부터의 탈퇴, 교회의 통폐합이 결의되었다. 다음 해 9월의 정기총회에 참가한 교회는 10교회, 대의원 37명, 세례교인은 불과 230명으로 감소하였다. 전후의 재일대한기독교회는 그러한 현실에서 출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1947년, 제 3회정기총회에서 연합회를 총회로 개칭하고 헌법과 신조를 제정하여 다음 해 제 4회정기총회에서 “재일대한기독교회총회”로 개칭하였다.

재일대한기독교회의 시동

1949년 2월, 카나다장로교회가 재차 재일한국인선교에 가담하게 되어, L.L. Young 일행이 내일(來日)하면서 선교비의 지원이 재개되었다. 1950년 12월 칸사이(關西)지방회, 1951년 4월 칸토(關東)지방회, 6월 세이난(西南)지방회, 1963년 10월 츄부(中部)지방회, 1985년 세이부(西部)지방회가 조직됨과 함께 부인전도회(1949) 및 청년연합회도 이 시기에 재조직되어, 총회는 선교활동의 기동적인 태세를 마련하였다. 1951년 7월에는 “기독신보”(基督申報:복음신문의 전신)를 발행하여 문서전도에 기여하게 되었다.

선교 50주년 : “우리의 살 길은 예수”(1958-1968)

1958년 “선교 50주년” 기념식전이 도쿄(東京)교회에서 거행되었다. 이후 10년마다 표어를 내세워 10개년 선교사업을 실시하게 되었다. 총회는 해방후, 전도와 교회의 재건·창립에 중점을 두었다. 특히 이 시기는 목사·전도자·신도가 교회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는 신도들을 한사람 한사람 심방하여 교회의 재건과 개척전도를 행함으로서 오늘 날의 총회의 기초를 쌓게 되었다. 총회는 1952년 “세계장로교회연맹”을 비롯하여 “일본기독교협의회”(JNCC)(1956년), “세계개혁파교회연맹”(WARC)(1958년), “세계교회협의회”(WCC)(1962년 준회원가맹신청승인),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1964년)에 가맹하게 되어, 선교를 에큐메니컬적으로 협조·수행하려는 자세를 분명히 하였다.

선교 60주년 : “그리스도를 따라서 이 세상으로”(1968-1978)

총회는 전후의 발자취 가운데, 동포사회의 고뇌로 부터 눈을 돌려 왔던 사실을 뒤돌아 보며 선교의 기본적인 자세를 복음신앙의 귀결로 삼아, “그리스도인은 그 살고 있는 사회에 변혁을 가져와야 할 책임있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함을 확인하고 선교정책의 전환을 꽤하였다. 1969년 “출입국관리법안”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1970년 “재일한국기독교회관”(KCC) 을 설립함으로 동포의 인권획득운동의 선구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1978년 “선교기본정책”의 채택, 1974년에는 “재일한국인 문제연구소”(RAIK)를 설립하였다. 같은 해, 총회는 세계 15개국으로 부터 대표 80명을 초청하여 제 1회 “소수자문제와 선교전략”회의를 개최하여 마이널리티의 인권획득운동의 세계적인 연대를 호소하였다. 1969년에는 본국의 각교단에서 단기적인 선교사를 파견받아 개척전도에 커다란 성과를 올리었다. 1973년 “일북미선교협력회”(JNAC)에 가맹한 것은 북미교회와 에큐메니칼적인 관계를 맺으며, 새로운 선교과제 특히 마이널리티문제에 대한 사명을 담당하는 파트너로서의 관계가 부여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