関東大震災第83周年記念追悼合同早天礼拝(韓国語)
게재일 : [06-09-10] 조회수 : 2383
83주년을 맞이한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사건
일본은 1923년 관동대지진이 발생한 9월 1일을 ‘재해 방지의 날’로 정해서 재난 재해에 대한 대피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주요 신문이나 언론사도 관동대지진 83주년을 맞이해 지진 참상을 다루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이다. 당시에 재일조선인들이 희생당한 역사적 의미에서의 관동대지진 재조명에는 일본 정부와 대세가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당시 참상의 본질을 흐리게 하고 있는 보도의 태도가 보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년에도 9월1일 오전7시반에 관동대지진 83주년을 맞아 당시 조선인학살의 비극을 다시 살피는 “관동대진재 제83주년 기념 추도 합동 조천예배”가 도쿄의 재일본한국 YMCA에서 열리게 되었다.
관동대지진은 1923년 9 월1일 오전11시58분에 일어났는데 사상 최대의 피해를 기록하였다. 사망자가 약10만명이요 행방불명이 약4만명이었다. 이에 당시의 일본은 국가적인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일본의 관헌과 자경단들이 죄없는 조선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한 것은 지진발생 다음날부터인데 일본 당국이 계엄령을 선포해 이를 위한 위기의식 조성에 재일조선인을 이용한 것이다.
일본관헌이 유언비어를 퍼뜨린 당시의 배경에는 1920년대 일본의 사회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1923년 당시의 일본 경제는 불황에 시달려 여론이 극도로 악화되고 국가전복의 위기 상황이라 지진으로 인한 폭동을 막기 위한 희생양이 필요했다는 것이었다.
당시의 경찰은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퍼뜨리는 동시에 민심이 극도로 불안해진 가운데 9월 2일 오후6시를 기하여 계엄령 선포하에 조선인들이 방화했다. 우물에 독을 살포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조선인의 학살을 단행한 것이다. 학살된 조선인의 수는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발표 숫자는 231명뿐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당시 학살을 당한 신원이 확인된 조선인의 숫자만해도 6415명에 이르며 전체적으로는 2만명 가량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학살은 도쿄와 가나가와현에서는 군과 경찰이 중심이 되어 행해졌고 치바현, 사이타마현에서는 자경단에 의해서 행해졌다. 이들 자경단은 죽창, 닛뽄도, 도끼,곤봉 등으로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으며 일본 관헌은 이를 방조하였다. 또한 일본정부는 군대 관헌의 학살은 은폐하고 그 책임을 자경단에 돌리는데만 급급하였다. 그뒤 일부의 자경단원은 형식상 재판에 회부되기도 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전원 석방되었다.
이 사건으로 일본 군부는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국가 의식을 조장하여 군국 주의로 나가는 길을 텄으며, 그 잔학한 행위는 일본의 역사에 씻을 수없는 오점으로 남았다.
이런 중대한 문제가 공적으로 방치된 현상을 우리들은 계속 물어야만 한다. 당시 이국 땅에서 억울하게 학살당한 조선인들의 넋을 기리고 기억하기 위해 지진 발생 83주년을 즈음해 오늘도 소규모 추도예배와 집회만이 있을 뿐이지만 이를 본국은 물론 전세계의 사람들이 분명히 알고 일본이 지금 무엇을 향하여 나아가려는가를 냉정한 눈으로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재일대한기독교회 총간사 박수길목사